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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장 이야기_Part 1. 요리는 나의 꿈

“<백사장 프로젝트>의 첫번째 사장이 될 이성진(27세)씨를 인터뷰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요리와의 특별한 인연을 가진 성진씨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언젠가 동생에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고 싶다! 그때부터 음식, 요리에 대한 꿈이 생긴 것 같아요.

 

한국에 온지 꽤 되었다고 들었어요! 북한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기억해요?

저는 북한에서 15살까지 살다가 왔어요. 이제 한국에 온지 12년 됐네요. 북한에도 가난한 사람 중에서 더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 가족은 더 가난한 사람이었어요.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한 명과 친할머니가 계셨어요. 아버지가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술 때문에 집안에 있는 물건을 팔거나 부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부모님께서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가시고는 했는데, 그 곳은 교통이 안좋아서 장사를 한번씩 가시게 되면 이틀 정도 집을 비우셨죠. 어느 날 부모님이 장사를 가신다고 이틀 먹을 옥수수가루 두고 가셨어요. 그런데 그날 학교를 다녀왔더니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이불 가지와 옥수수 가루를 다 가져갔어요. 동생과 둘이 돌아와서 문 열린 집을 확인하고 엄청 울었어요. 겨울이라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 수 가 없었어요. 동생과 둘이 배 밭에 가서 얼은 배를 손으로 녹여서 나눠 먹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날 집에 일찍 돌아오셨어요. 어머니가 강냉이 죽을 구해다가 밥을 주셨어요. 동생은 배가 부르다면서 밥을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동생이 숨을 쉬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와 저녁에 병원에 가려고 일곱살인 제가 동생을 업고 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가는 도중에 동생이 죽었어요. 죽은 동생을 업고 병원에 도착했죠. 그 때부터는 후회와 원망이 밀려왔어요. 어린 동생이 얼린 배를 소화시키지를 못했던거죠. 7살이었지만 인생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음날 뒷산에 동생을 묻었어요. 제사상을 차리려 하는데 차릴 음식이 없었어요. 옥수수죽 한 그릇을 올렸어요. 결국 굶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언젠가 동생에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고 싶다고! 그때부터 음식, 요리에 대한 꿈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동생의 묘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 제사상을 제대로 차려주고 싶어요.

그럼 한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되었어요?

그 후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셨어요. 그리고 저를 할머니 집에 보냈어요. 아빠와는 헤어졌고 엄마는 장사를 가야하니까 쪽지를 주면서 할머니 집에 가서 지내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저를 엄청 예뻐해주셨어요. 엄마는 3일 후에 오신다고 했는데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할머니가 예뻐해주셔도 부모님이 부재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꼈어요. 어느날 할아버지가 엄마가 죽었다고 얘기해줬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때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 정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할머니는 저에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 정신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살림이 어려우니 큰아버지쪽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집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그 집에서 살 때 먹는 것 때문에 서러운 일도 있었어요. 어느날은 할아버지가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봤어요. 몇 년 동안 엄마가 죽은 줄로 알았기때문에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가끔 청진에 다녀오시면 밥상에 반찬이 달랐어요. 그게 바로 엄마가 보내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얘기를 해주셨어요. 엄마가 남조선에 살고 있고 엄마를 만나러 가야한다. 지금까지는 네가 어렸기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얘기했다. 친구들에게 얘기하거나 그러면 큰일 난다고 말씀하셨어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보러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때부터는 엄마를 본다는 생각에 너무 설렜어요. 사실 남조선이 어딘지, 얼마나 가기 힘든지 전혀 몰랐어요. 이모부 도움으로 무산까지 갔어요. 탈출 첫 시도에 군인에게 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는데, 목숨 걸고 시도했던 두번째에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죠. 엄마가 보내준 돈으로 강을 건넜더니 훨씬 수월 했어요.

가장 예민할 청소년시기에 한국에 왔는데 적응하기 힘들지는 않았나요?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몇 학년부터 다니겠냐고 해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 다니기로 했어요. 15살에 초등학생이 된거죠. 일반학교였는데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싸워서 문제도 많이 일으켰어요. 애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북한에서 왔다고 얘기도 못하고 힘들었어요. 뭔가 부끄럽고 뉴스에서는 남북관계도 안좋고, 애들한테 얘기하면 싫어할 것 같았어요. 그게 답답해서 그냥 얘기했어요. 사실 북한에서 왔다고 해도 애들은 이해를 못하죠. 어떤 한 친구가 나는 너가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 라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도움을 줬어요. 집에 가서 시간되면 인터넷으로 EBS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알려줬어요. 저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과목별로 내가 모르는 것을 확인해서 볼 수 있었으니까, 그걸 보고 공부해서 시험에 나오면 그게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요리 특성화 학교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특성화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거는 선생님 추천서 덕분이었어요. 중학교 선생님이 내가 삼년동안 지켜봤는데 자신이 키웠던 제자 중에 최고다. 그래서 선생님이 자존심을 걸고 너를 보냈으니 꼭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요리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군요. 요리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특성화 학교라서 공부 잘 하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저는 과가 100명이면 그 중에 70등 왔다갔다했어요. 야자도 안했고, 그런데 실기는 항상 1, 2등이었어요. 그래서 유명했어요. 선생님께서도 너 재질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책도 갖다 주시고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요리 자격증을 준비하는데 필기를 10번을 떨어졌어요. 그래서 안하려고 했어요. 그 때도 선생님 도움으로 땄어요. 시험비도 없고 계속 떨어지니깐 창피하고, 제가 시험 안보겠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시험 등록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붙으면 안 갚아도 되고, 떨어지면 갚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 돈을 아끼겠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60점이 학격점인데 85점 90점으로 합격했어요! 선생님이 기뻐하시면서 실시 시험 준비하라고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필기 시험은 한번에 붙지만 실기는 붙지 못해서 힘들어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필기 실기는 한번에 합격했어요. 그러다 대학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탈북민 특별전형이 있으니까 친구들이 소위 좋은 학교에 가요.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학교만 생각하고 가려고 했어요. 서강대 경영학과에 가려고 했는데 저희 선생님이 저를 붙들고 우셨어요. 너는 요리를 해야 한다. 교회에 다니는 선생님이셨는데 요리학 박사 학위를 갖기까지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셨어요. 그래서 계속 고민하면서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지원 마감 하루 남겨 놓고 열심히 지원서를 써서 냈어요. 떨어질까봐 선생님께도 말씀을 못드렸어요. 서류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러 갔어요. 면접에서 언제가 가장 즐겁냐고 물어봤어요. 요리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다 먹지 않아도 내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한입이라도 먹으면 그게 너무 감사하다고 얘기했어요. 또 요리와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죠.

선생님께서 성진씨의 은인이네요.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했다면서요!

대학교에 입학했더니 다른 친구들은 목표가 없어보였어요.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4년동안 찾아보겠다고 말해요. 그래서인지 60명 있는 첫 수업에 교수님이 저보고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15살에 탈북한 이야기랑 대학교에 온 과정을 이야기했더니 친구들이 박수쳐줬어요. 그리고 친구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어요. 교회가면서 술을 끊었는데 대학교 가서 친구들이 왜 술마시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그래서 친구들이나 선배들한테 얘기했어요. 내가 여기 올 때 혼자 온게 아니다.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이야기를 해요. 그럼 술 마시라고 강요 안해요. 그게 너무 감사하죠. 한번은 대회에 나갔어요. 농림축산부에서 하는 경연대횐데 주제가 북한요리대회였어요. 제가 북한에서 왔고 요리를 하고 있으니 잘 맞자나요. 그날이 제 생일이었는데 생일을 꼭 기쁘게 맞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달동안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제가 만든 음식이 평양온밥이라고 온면 같은건데 면이 아니라 밥이 들어간거였거든요. 요리를 하면서 잘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어요. 심사위원들이 제 요리를 생소해하면서도 정말 맛있어했어요. 심사위원이 정말 좋아면서 이 단품으로도 시장에 내 놓으면 대박이라고, 결국 대회에서 3등을 했어요. 300명이 넘는 참가자가 있었는데. 심사위원들이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면서 명함도 주시고 정상에서 만나자고 얘기도 해주셨어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성진씨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느낄수 있었습니다! 또한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는지, 특별하게 생각하는 지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백사장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된 사람같았습니다. 다음 Part 2에서는 <백사장 프로젝트> 창업 1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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